# '늦었다'고 생각했다.
일곱시 반에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
일찌감치 아침을 차려먹고,
따땃한 방바닥에도 좀 누워있다가
씻고, 머리 말리고, 화장하고, 옷 입고
시계를 보니 웬걸,
아홉시 반이 넘어가고 있다.
'늦을 것 같아'
허둥지둥 집을 나서면서 후회가 밀려온다.
아침먹고 다시 눕지 말걸
너무 오래 씻었나
아이섀도는 생략할걸
전날 옷을 미리 골라놓았어야 했나
하지만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
그저 '가장 빨리' 도착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.
오늘은 돈보다 시간이 더 아까워서 택시를 탔는데
미터기에 요금 올라가는 것 보다 그 위 시계에 숫자가 바뀌는 것이 더 신경이 쓰인다.
조바심이 난다.
많이 늦지는 말아야 할 텐데
# '늦었다' 라고 생각했다.
계획했던 인생의 시간표에서
내가 지금 서 있는 지점은 사람들이 정해놓은 통상적인 경로에서 한참이나 뒤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.
출발은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
남들보다 일년 일찍 학교에 들어갔고,
재수도 안했고 (지금 생각하면 인생에서 1년쯤은 아무것도 아닌데, 그때는 왜 '있을 수 없는 일' 이라고 생각했는지..)
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직도 했었고
4학기를 넘기지 않고 논문도 통과되었다.
시작은 조금 이르게, 그리고 늦지 않게 잘 걸어온 줄 알았는데
가만 멈춰 돌아보니
친구들보다, 남들보다
사람들이 정해놓은 인생길에서 나는 '이만큼이나' 뒤쳐져 있는것만 같았다.
괜찮은 척 했지만 이따금 조바심이 났다.
아까 택시 안에서 초조했던 그 마음과 같이
# 다시 오늘
예상대로(당연히) 계획된 '10시'까지 는 늦었고,
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헐레벌떡 뛰어갔는데
'아직' 모임이 '시작되지 않았다'.
갑작스레 앞뒤 일정이 바뀌어서 좀 늦춰지게 되었다고.
오늘 그 모임은 내가 도착하고도 한참이나 지나
11시가 다 되어서야 시작되었다.
나는 자리에 앉아 일단 숨을 좀 고르고
미리 모여있는 네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
'여유롭게' 그 모임에 함께 할 수 있었다.
'늦었다'. 하지만 '늦지 않았다'.
사람들이 계획했던 '10시'에 한참이나 늦었고
내가 계획했던 시점,
그리고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'서른'의 모습에서도 늦었는지도 모른다.
하지만
오늘 모임의 시작은 10시가 아닌,
모두가 모인 그 시점이었고
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또한
내가 계획한 '서른'이 아니라
분명 정하신 '그 때'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.
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,
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(잠언 16: 9, 새번역)
결말을 미리 알고있는 책의 첫 장을 다시 넘기는 것처럼
여유있게, 느긋하게
그렇게 다시 걸어볼까?
빠르다, 느리다의 우리가 정해놓은 '규정속도'에 부합하느냐가 아니라
'사건'이 일어나고 전개되는 방향이 중요한게 아닐까
프로그램 만들때도
'event'가 일어나면 어떻게 하라~ 라고 명령어를 구성하는거지
빠르다면, 느리다면, 이라는
측량할 수도 없는 '주관적인' 조건문을 작성하지는 않지 않나?
잔뜩 엉켜있던 매듭의 실마리를 잡은 듯한 기분이다.
언젠가는 선명하게 매듭이 풀리듯
알게 되겠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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